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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휴지통에…삶의 거품이여, 굿바이


복잡한 인간관계·데이터·소장품…연말 정리하는 사람들

“인생의 절반은 정리하는 데 소비한다. 나는 연말이 되면 내 인생을 정리하는데 잠자는 시간도 모자란다!”

오야 소이치(大宅壯一). 일본을 대표하는 저널리스트 겸 평론가인 그에게는 연말만 되면 또 다른 수식어가 붙곤 했다. 바로 ‘정리(整理)인’. 1970년 사망 전까지 그는 매년 연말이 되면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 열중했다. 한 해 동안 본 책, 낙서 쪽지, 심지어 빠진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모으며 한 해를 반추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지 않으면 인생이 고달프니까….”

그의 정리 증후군은 사후 ‘작은 씨앗’이 됐다. 1971년 그가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그의 이름을 딴 잡지 전문 도서관 ‘오야 소이치 분코(大宅壯一 文庫)’가 도쿄에 지어진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애정을 가지려 했던 오야 씨. 그의 정리가 ‘수집’이었다면 내년에 고3이 되는 고등학생 이영진(17) 군에게 정리는 ‘포기’를 뜻한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중구 남대문 지하상가 내 한 중고 음반점. 배낭 두 개를 힘겹게 메고 나타난 이 군은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아이돌 그룹들의 음반부터 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 같은 팝 음반까지 수십 장을 무거운 배낭 속에서 끄집어냈다. 왜일까.

“내년에 고3이에요. 대학 가야죠.” 10분 뒤 그는 현금 13만 원을 쥐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는 “이 돈은 ‘엠씨스퀘어’(집중력 향상 학습기) 사는 데 보탤 것”이라며 웃었다.

어느덧 달력도 마지막 한 장만 남은 2008년. 극심한 경기 침체로 송년 모임은 줄었고 주머니에는 짤랑거리는 동전뿐. 직장인 두 명 중 한 명은 송년회 횟수와 비용을 모두 줄이겠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우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허한 마음을 부여잡고 돌아보자. 그래, 해답은 ‘정리’다. 내 주변에 쌓인 물건, 사람들, 컴퓨터 하드디스크 속 필요없는 대용량 파일까지. 2008년 연말, 나는 정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물건 처분은 곧 놀이

“정리요? 또 다른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더라고요.”

열흘 전 직장인 김나영(26) 씨가 물건 정리를 위해 찾은 곳은 인터넷 쇼핑몰 ‘옥션’의 중고장터. 홍콩 여행 때 샀던 코트와 신발, 액세서리 등 총 15개 상품에 대한 글과 함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올렸다. 목적은 바로 여행. 김 씨는 여기서 생긴 돈으로 내년 초 중동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11월 넷째 주 옥션의 중고장터에 “처분한다”며 올라온 매물 수는 약 5만여 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배로 늘었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 헌책방 ‘고구마’에는 책을 한꺼번에 50권 이상 팔겠다는 ‘서재 정리’ 메뉴 신청건수가 11월 한 달만 160건이나 됐다.

경기 침체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명품 업계도 정리 분위기는 예외가 아니다. 서울 중구 소공동 중고 명품점 ‘구구스’의 직원은 “최근에는 급전(急錢)이 필요한 30대 남성 직장인들이 명품 가방을 맡기는 사례가 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젊은층에게는 물건 정리가 하나의 놀이 문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회원 수 270만 명을 자랑하는 인터넷 카페 ‘중고나라’에는 최근 ‘물건 정리’, ‘처분’ 등의 게시글이 하루에만 2만 건 이상 게재되고 있다. 동양화 서양화 등 각종 미술작품부터 관악기 현악기 등 고가(高價)의 악기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려는 글들이 1분에 3, 4개씩 경쟁적으로 게시되고 있는 셈.

불필요한 물건 팔고

산더미 컴데이터 눈 딱감고 삭제

답답하던 가슴 뻥~


이러자 물건 처분에 대한 갖가지 노하우도 생겨났다. 음식물 건조기, 전기면도기 등 가정용품을 처분하려는 주부 박은주(32) 씨는 “무조건 싼값에 처분하지 말고 비슷한 제품을 판매하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을 파악해 대세 가격보다 1000원이라도 싸게 내놓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부를 통해 물건을 정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교사 김형중(36·경기 포천 동남고) 씨는 학생들과 함께 1년간 봤던 소설책과 수시 합격생들이 보다 만 참고서, 교과서 등 책 100여 권을 모아 지난주 한 자선단체에 기증했다. 김 씨는 이러한 자신의 정리를 ‘순환’이라고 말했다. 버리면 끝이지만 기증함으로써 책의 생명력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씨는 이달에도 200권 기증을 목표로 학생들과 함께 책을 모으고 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과거 소비자들은 물건을 사 쓰기만 했다면 지금은 처분, 폐기까지 스스로 책임지며 유통 사이클에 관여하는 ‘프로슈머’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 데이터 정리는 심리 전쟁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명령어에 벌벌 떨었던 기억, 이제야 벗어났어요.”

직장인 이일희(26) 씨의 연말 정리는 ‘삭제’ 버튼 클릭에서부터 시작됐다. 1년간 모아온 수십 GB(기가바이트)의 mp3 파일을 모두 컴퓨터의 휴지통에 처넣었버린 것. mp3플레이어만 6개를 갖고 다닐 정도로 음악광인 이 씨에게는 파격적인 결단이었다.

“노래 제목이나 날짜, 음반 재킷 등을 파일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쌓아두기만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날마다 컴퓨터 용량만 줄어들고 나중엔 어떻게 해야할지 초조해지더라고요.”

그는 결국 디지털 문화의 노예가 되는 것 같아 과감히 모든 파일을 삭제했다. 그는 “아쉽지만 필요하면 다시 음악 사이트에서 내려받으면 된다”며 “불안감이 사라져 그저 속 시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데이터와의 한판 싸움일까? 수백, 수천 개의 파일이 짓누르는 ‘압박감’은 단순히 물건 한두 개 정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부담을 안겨준다.

하지만 적대적인 관계만은 아니다. 광고기획자 김의수(34) 씨는 지난달 집에서 짐 정리를 하던 중 수십 장의 공(空) CD와 공 DVD를 발견했다. 시간을 내 한 장 한 장 확인하다 보니 그것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신혼여행 사진과 동영상들이었다. 최근 김 씨는 디지털 주소록도 정리했다. 800명의 온·오프라인 인맥을 주소와 연락처 순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김 씨는 “사진, 주소록, 동영상 등 개인의 추억이 디지털 데이터로 바뀌었기에 데이터 정리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데이터 정리는 컴퓨터, 디지털 기기를 넘어 온라인 데이터로 확장됐다. 다른 주제로 2∼3개씩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 블로거들이 늘자 블로그 통합과 정리를 대신 해주는 ‘블로그 이사’ 서비스도 화제가 되고 있다. 블로그 이사 업체 ‘프리덤’에 지난주 들어온 블로그 이사 요청 건수는 300건이나 됐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이 본인이 가입한 사이트 중 필요없는 것을 대신 정리해주는 ‘개인정보 클린 캠페인’을 벌였는데, 29만7800명이 1480만 건의 탈퇴 신청을 했다. 이는 모든 누리꾼이 1인당 50여 개의 사이트를 정리하길 원한다는 뜻이다.

○ ‘관계’에 대한 진중한 고찰

명품 가방을 처분하고, 안 쓰는 물건을 기부하고, 데이터까지 정리한 당신. 하지만 정리의 끝은 아직 멀었다. 마지막 종착역은 바로 마음의 정리. 여기, 얼마 전 미니홈피를 탈퇴한 대학생 김관영(가명·26) 씨를 소개한다.

“내가 가장 정리하고 싶은 건 인간관계죠. 얼마 전 2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인맥이 넓은 편이었는데 그게 고스란히 부담이 됐죠. ‘1촌’을 맺은 200명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사라지자는 생각이 앞섰죠.”

관계의 정리는 직업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회계법인에서 일하던 신재호(30) 씨는 얼마 전 돌연 사표를 내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다. 이유는 조직생활에서의 수많은 ‘관계’와 ‘경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 그는 “수시로 두통약을 먹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그는 상대적으로 사람들과 덜 부딪칠 것 같은 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좀 더 범위를 넓혀 ‘마음’을 정리해야 할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철강회사 임원이었던 박정만(가명·58) 씨는 가진 재산에 퇴직금을 합쳐 5억 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2억 원을 날렸다. 그 후 박 씨는 몇 주째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서점에는 인간관계 극복, 마음 정리 관련 책이 부쩍 많아졌다. 인간관계론의 고전인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양장본, 핸드북 등 각종 형태로 출간됐으며 마음의 정리를 달콤한 초콜릿에 비유한 ‘심리학 초콜릿-나를 위한 달콤한 위로’ 등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퇴근시간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심리학 코너는 성인들로 북적인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경제 불황으로 다시금 뒤를 되돌아보는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그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낀 삶의 거품, 표피적인 삶에 대한 염증이 한꺼번에 부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무조건 스스로에게 가혹해지면 무력감과 우울함만 커질 수 있다”며 “내가 잘한 일을 되새겨보고 반성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만 고르되 ‘앞으로는 ∼게 하자’ 식의 긍정형으로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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